첫 번째 궁금증
궁금해요
안 보이는데 믿으라고요? 가장 센 질문부터 묻겠습니다.
“증명도 못 하잖아”, “고통을 왜 두시는데?” 같은 질문을 피하지 않을게요. 아래 목록에서 가장 거슬렸던 질문을 누르고 답부터 보세요.
먼저 약속해요
-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일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정직한 질문은 믿음을 더 깊게 해 줘요.
- 아래의 비유는 논리를 쉽게 보여 주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에요. 비유가 설명하는 점과 설명하지 못하는 점을 나누어 볼게요.
-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고 말해도 괜찮아요. 믿음은 억지로 강요하는 답이 아니라 자유롭게 드리는 응답이에요.
오늘의 한 문장 하느님은 우주 안에 숨어 있는 한 물건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게 하시는 근원이세요.
1. 안 보이는 하느님을 믿으라니, 상상 아닌가요?

아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는데 하느님이 계신다고 어떻게 알아요?”
대답: “눈에 안 보이니 없다.”는 말은 원래 눈에 보여야 하는 물건에는 맞을 수 있지만, 모든 것에 적용되지는 않아요. 생각, 사랑, 중력처럼 보이지 않아도 그 결과를 살펴 알게 되는 것이 있어요. 하느님은 몸을 가진 물건이 아니므로 망원경으로 발견할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안 보이는 것도 있다.”는 말만으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아요. 가톨릭 신앙은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왜 자연에 이해할 수 있는 질서가 있는지, 왜 인간이 진리와 선을 찾아야 한다고 느끼는지,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지를 함께 물어요.
비유 — 바람과 나뭇잎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흔들리는 나뭇잎과 측정된 공기의 움직임으로 바람을 알아요. 하느님을 바람처럼 측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이 비유는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없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 줘요.
짧게 답하면: “안 보인다는 것과 없다는 건 달라. 하느님은 물건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흔적을 살펴보는 거야.”
2. 세상이 복잡하다고 창조주를 끌어들이는 건 억지 아닌가요?

아이: “그냥 우주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 아닐까요?”
대답: “우주가 아주 오래되었다.”와 “우주가 아무 이유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같은 말이 아니에요. 시작이 없다고 가정해도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 왜 이런 법칙을 지니는지는 여전히 물을 수 있어요.
우리가 아는 세상 속 존재들은 생겨나고 변하며 다른 것에 기대어 있어요. 나무는 햇빛과 물에, 우리는 공기와 음식에 기대어 살지요. 가톨릭 철학은 이렇게 존재를 받은 것들만으로는 전체 설명이 끝나지 않으며,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모든 것에 존재를 주는 근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근원을 하느님이라고 불러요.
비유 — 오래 켜진 전등
전등이 아주 오래전부터 켜져 있었다고 해도 지금 전기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언제 켜졌는가?”와 “무엇에 기대어 지금 켜져 있는가?”는 다른 질문이에요. 이 비유는 하느님을 우주의 첫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으로 생각한다는 뜻이에요.
조금 더 깊게: 과학이 아주 먼 과거의 우주를 설명해도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남아요. 하느님은 과학이 아직 모르는 빈칸에 잠깐 넣는 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궁극적인 근원이세요.
짧게 답하면: “우주가 오래되었거나 시작이 없다고 해도, 왜 존재하며 무엇에 기대어 있는지는 따로 물어야 해. 그리스도인은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는 존재의 근원을 하느님이라고 불러.”
3.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는데요? 답을 피하는 것 아닌가요?

아이: “모든 것을 하느님이 만들었다면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대답: 그리스도인은 “존재하는 것은 전부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아요. 생겨났거나 다른 것에 기대어 존재하는 것에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해요. 하느님은 우주 안에서 생겨난 또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시작이 없고 다른 것에 기대지 않는 존재의 근원이라는 뜻이에요.
만일 하느님도 누군가에게 만들어졌다면 그 존재가 더 근본적인 설명이 되어야 하므로 질문은 끝나지 않아요. 물론 이것만으로 하느님이 실제로 계시다는 증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하느님도 누가 만들었나요?”라는 질문이 가톨릭이 말하는 하느님을 피조물 하나로 잘못 놓고 묻는 것임을 알려 줘요.
비유 — 이야기와 작가
동화 속 인물은 책의 어느 장면을 뒤져도 작가를 등장인물처럼 찾아낼 수 없어요. 작가는 이야기 속 인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물론 작가도 하느님과 똑같지는 않아요. 이 비유는 창조주를 피조물 가운데 하나처럼 찾으면 안 된다는 점만 알려 줘요.
짧게 답하면: “하느님은 만들어진 것들의 첫 번째가 아니라, 만들어진 모든 것이 존재하게 하는 시작 없는 근원이야.”
4. 과학이 다 설명하면 하느님은 결국 필요 없어지지 않나요?

아이: “옛날 사람들이 과학을 몰라서 하느님을 만든 것 아닐까요?”
대답: 과학이 자연 현상을 아무리 많이 설명해도 그 사실만으로 “그러므로 하느님은 없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아요. 과학은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자연이 어떤 원인과 과정으로 움직이는지 연구해요. 하느님은 번개나 생명의 빈칸을 대신 설명하는 자연 속 원인이 아니라, 자연과 법칙 자체가 왜 존재하는지를 묻는 철학적·신앙적 질문의 답이에요.
비유 — 끓는 주전자
“물이 열을 받아 끓는다.”는 설명과 “아픈 동생에게 차를 주려고 물을 끓인다.”는 설명은 서로 지우지 않아요. 첫째는 물리적 과정을, 둘째는 사람의 목적을 말해요. 자연의 과정을 완벽하게 설명해도 존재의 근원과 목적을 묻는 질문까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반박: “그러면 과학이 모르는 것은 전부 하느님이라고 하는 거네요?”
다시 답하기: 그렇게 말하면 정말 억지가 돼요. “아직 설명하지 못했으니 하느님이다.”라고 해서는 안 돼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미해결 현상이 아니라,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연 법칙이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 인간의 이성과 양심,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증언처럼 과학의 빈칸이 메워져도 남는 근거로 판단해야 해요.
짧게 답하면: “과학이 설명하는 것은 자연의 과정이야. 하느님은 모르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자연 전체가 왜 존재하는지를 묻는 답이므로, 과학이 발전한다고 자동으로 사라지는 분은 아니야.”
5. 빅뱅과 진화를 믿으면서 창조를 말하는 건 모순 아닌가요?

아이: “우주는 빅뱅으로 생겼고 생물은 진화했다는데요?”
대답: 모순이 아니에요. 빅뱅 이론과 진화론은 우주와 생명이 자연 안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연구해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말은 그 자연과 법칙과 생명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존재를 받았다는 신앙 고백이에요.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으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검증된 과학 연구를 존중하며, 특정 과학 이론을 하느님의 존재 증명으로 삼지도 않아요. 과학 이론이 더 정확해져도 “자연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에 대한 답이 달라질 뿐, “왜 자연 자체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남아요.
비유 — 빵이 만들어지는 두 가지 설명
“반죽이 효모 때문에 부풀고 오븐의 열로 구워졌다.”는 설명과 “아빠가 가족을 위해 빵을 만들었다.”는 설명은 싸우지 않아요. 하나는 과정에, 다른 하나는 만든 이와 목적에 초점을 맞춰요. 이 비유도 창조의 신비 전체를 담지는 못하지만 두 설명이 함께 참일 수 있음을 보여 줘요.
짧게 답하면: “과학은 창조 안의 과정을 연구하고, 신앙은 모든 존재의 근원과 목적을 고백해.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건 아니야.”
6. 그냥 우연인데 ‘설계’라고 갖다 붙이는 것 아닌가요?

아이: “질서와 아름다움도 그냥 우연의 결과일 수 있지 않나요?”
대답: 질서나 아름다움 하나만 보고 곧바로 “그러니 설계자가 있다.”고 단정하면 충분한 논증이 아니에요. 우연한 사건도 실제로 일어나고, 진화에서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도 중요한 역할을 해요.
그러나 과학에서 말하는 우연은 보통 “아무 원인도, 아무 법칙도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일정한 법칙과 조건 안에서 어느 결과가 나올지 정해져 있지 않거나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번 결과가 우연히 나왔다.”는 설명과 “우연과 법칙이 작용할 수 있는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구별해야 해요.
비유 — 주사위와 놀이판
주사위에서 6이 나온 것은 우연일 수 있어요. 하지만 주사위와 놀이판과 규칙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왜 6이 나왔을까?”와 다른 질문이에요. 이 비유가 곧 설계자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연이라는 말이 존재와 법칙에 관한 모든 질문의 답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줘요.
짧게 답하면: “우연은 어떤 일이 일어난 방식을 말할 수 있지만, 왜 존재와 법칙이 있는지까지 저절로 설명하지는 않아.”
7. 하느님이 선하다면 왜 아이들까지 고통받게 두나요?

아이: “전쟁과 병과 지진이 있는데도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답: 이 질문에는 모든 고통의 이유를 밝혀 주는 짧은 답이 없어요. 특정한 아이가 왜 병들거나 전쟁에서 다쳤는지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해요. 그것은 그 아이의 죄나 믿음 부족 때문이 아니며, “더 강하게 만들려고 하느님이 일부러 아프게 하셨다.”고 말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은 자유를 악하게 사용한 결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어요. 지진과 질병 같은 자연의 고통은 자유만으로 설명되지 않아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물질세계에서 몸을 지닌 생명은 다치고 병들 수 있지만, 이 사실도 한 아이의 고통이 왜 허용되었는지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해요.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께서 악을 선하다고 여기거나 즐기신다고 말하지 않아요. 하느님께서 왜 지금 이 고통을 막지 않으셨는지 우리가 모를 때가 있음을 인정해요. 동시에 예수님께서 고통받는 이와 함께 우시고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을 겪으셨으며, 부활로 악과 죽음이 마지막 결말은 아니라고 약속하셨다고 믿어요. 이 희망은 고통을 설명하며 구경하라는 말이 아니라, 아픈 이를 돌보고 전쟁과 불의에 맞서라는 명령이에요.
짧게 답하면: “왜 이 고통이 허용됐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할게. 다만 하느님이 고통을 즐기거나 벌로 주신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아파하시고 결국 악과 죽음을 이기신다고 믿기에, 지금 우리는 고통을 줄이려고 행동해야 해.”
8. 아무리 기도해도 침묵하는데, 정말 듣고 계신가요?

아이: “열심히 기도했는데 할머니가 낫지 않으셨어요.”
대답: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어요. 하지만 “들으신다.”는 말이 “내가 요청한 결과를 반드시 주신다.”는 뜻은 아니에요. 예수님도 고통을 앞두고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맡기셨어요. 그리스도교는 기도하면 병과 죽음을 언제나 피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아요.
왜 할머니가 낫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우리가 바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는 함부로 설명할 수 없어요. 병이 낫지 않은 것은 환자나 가족의 믿음이 부족했다는 증거가 절대로 아니에요. 슬프고 화난 마음도 숨기지 않고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어요.
기도는 하느님을 조종하는 주문이 아니라 그분께 청하고, 듣고, 맡기며 관계를 맺는 일이에요. 상황이 달라지기를 청하는 동시에 치료받고 돌볼 용기, 견딜 힘, 옆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일 마음도 구해요. 때로는 우리가 다른 이의 기도에 응답하는 도움의 손길이 되어야 해요.
짧게 답하면: “하느님이 들으신다는 것과 내 부탁을 그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은 달라. 왜 낫지 않았는지는 안다고 꾸며 말하지 않을게. 믿음이 부족해서도 아니야. 슬픔까지 하느님께 말씀드리며 사랑하고 견딜 힘을 구할 수 있어.”
9. 종교가 수천 개인데 그리스도교만 맞다는 건 독선 아닌가요?

아이: “사람마다 믿는 종교가 다른데 모두 사람이 만든 것 아닐까요?”
대답: 종교가 많다는 사실만으로 “모두 거짓” 또는 “모두 똑같이 참”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아요. 종교들은 하느님, 인간, 구원에 관해 서로 모순되는 주장도 하므로 모두가 같은 뜻으로 참일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정답이 없다고 할 수도 없어요. 각 주장이 실제 세계와 인간의 삶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어떤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 살펴야 해요.
가톨릭교회는 다른 종교에 있는 참되고 거룩한 것을 존중해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셨다고 믿어요. 그래서 단지 “우리 종교니까”가 아니라, 실제 역사 속 인물인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죽음, 제자들이 전한 부활 증언을 검토하는 일이 핵심이에요. 믿음은 강요할 수 없으며,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과도 존중과 사랑으로 대화해야 해요.
짧게 답하면: “종교가 많다는 것은 비교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지, 모두 거짓이라는 증거는 아니야. 가톨릭은 다른 종교의 진리도 존중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역사와 증언 때문에 그분 안에 충만한 진리가 있다고 믿어.”
10. 착한 무신론자보다 나쁜 신자가 많은데 믿음이 무슨 소용인가요?

아이: “하느님을 안 믿어도 착하게 사는 사람이 많은데요?”
대답: 맞아요. 믿지 않는 사람도 양심을 따라 선하게 살고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요. 신앙의 목적은 “우리가 무신론자보다 더 착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잘못을 용서받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계속 변화되는 것이 목적이에요.
신앙이 있다고 자동으로 착해지지는 않아요. 신자가 거짓말하거나 폭력을 쓰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긴 것이고, 교회의 말도 믿기 어렵게 만들어요. 그 잘못은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바로잡아야 해요. 나쁜 신자의 존재가 하느님이 없다는 직접 증거는 아니지만, 그 신자의 믿음이 삶에서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돼요.
반박: “종교 때문에 전쟁과 폭력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다시 답하기: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은 실제 잘못이며 숨기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돼요. 그것은 사람이 거룩한 가르침까지 욕심과 권력에 악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줘요. 그러나 어떤 믿음이 악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아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따랐는지 어겼는지를 나누어 살펴야 해요.
짧게 답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선하게 살 수 있고, 신앙은 도덕 우승장을 주지 않아. 신앙의 쓸모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데 있어. 그런 열매가 없다면 신자는 변명하지 말고 회개해야 해.”
11. 하느님은 불안한 사람이 만든 위로용 상상 아닌가요?

아이: “죽는 것이 무서우니까 천국과 하느님을 상상한 것 아닐까요?”
대답: 죽음이 두려워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하느님과 천국이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아요.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바란다고 해서 물이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반대로 간절히 바란다고 무조건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위로가 되느냐?”보다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느냐?”를 살펴봐야 해요.
그리스도교는 편안한 말만 하지 않아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약한 이와 나누며,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라고 요구해요.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안전하고 편해지려고 믿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불이익과 박해를 감수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어요. 그들이 희생했다는 사실만으로 부활이 참이라고 증명되지는 않지만, “그저 마음이 편하려고 꾸민 이야기”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은 보여 줘요. 결국 예수님에 관한 증언과 하느님을 믿을 다른 이유를 따로 살펴야 해요.
짧게 답하면: “두려움 때문에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 하지만 믿게 된 심리와 그 믿음이 참인지는 별개야. 위로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어.”
12. 증명도 못 하면서 왜 하느님이 계신다고 확신하나요?

아이: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면 믿을게요.”
대답: 먼저 정직하게 말하면, 하느님을 실험실에서 반복 측정하는 식의 과학적 증거는 없어요. 가톨릭교회도 하느님이 자연 속 물질처럼 검출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아요. 그러나 “과학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았다.”와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같은 말은 아니에요. 역사적 사건은 문서와 증언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은 오랜 말과 행동으로 판단하듯 대상에 맞는 방법이 필요해요.
가톨릭 신앙이 실제로 살펴보자는 근거는 구체적이에요. 첫째, 생겨나고 사라지며 서로 기대어 있는 세계가 왜 존재하는가. 둘째, 자연에 일정한 법칙이 있고 인간의 이성이 그 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셋째, 인간의 존엄과 “악을 행하면 안 된다.”는 도덕적 의무가 단순한 취향 이상이라고 말할 근거는 무엇인가. 넷째,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을 전한 초기 증언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예요.
반박: “그 근거들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잖아요?”
다시 답하기: 맞아요. 어느 하나가 수학 공식처럼 하느님을 강제로 인정하게 만들지는 않으며, 각각 반론도 있어요. 그래서 신자는 “완벽히 증명했으니 의심하면 비이성적이다.”라고 말하면 안 돼요. 다만 반론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근거가 없다는 말도 같지 않아요. 하느님이 계신다는 설명과 계시지 않는다는 설명 중 어느 쪽이 세계, 인간,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더 잘 설명하는지 정직하게 비교할 수 있어요. 신앙은 이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 살핀 뒤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유로운 응답이지, 생각을 멈추는 일이 아니에요.
짧게 답하면: “하느님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고 말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세계의 존재와 질서, 인간의 존엄과 양심,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증언은 실제로 검토할 수 있는 근거야. 반론까지 비교한 뒤 믿는 것은 맹목이 아니야.”
친구가 반박할 때 이렇게 대화해요
- 먼저 뜻을 물어요. “네가 말하는 하느님은 어떤 모습이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뭐야?”
- 아는 만큼만 말해요. “그건 나도 더 알아볼게.”라는 대답은 부끄럽지 않아요.
- 상처에는 논리보다 공감이 먼저예요. 누군가 아픈 일을 겪었다면 곧바로 설명하려 하지 말고 “정말 힘들었겠다.”고 말해요.
- 사람을 공격하지 않아요. “너는 틀렸어.”보다 “나는 이런 이유로 다르게 생각해.”라고 말해요.
-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에요. 진리를 함께 찾고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예요.
30초 대답 “나는 과학 대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야. 과학이 밝혀 주는 우주의 과정도 배우면서, 왜 우주와 법칙과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묻는 거야. 하느님은 안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믿어. 나도 모든 답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생각해 볼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부모님과 교리교사를 위한 진행 방법
- 초등 고학년부터 중학생까지는 한 번에 두세 문답만 골라 10분 정도 대화해 보세요.
- 먼저 아이의 답을 물어보세요.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떤 점이 제일 이해되지 않아?”
- 비유를 들려준 뒤 “이 비유가 알려 주는 점은 무엇이고, 설명하지 못하는 점은 무엇일까?”를 함께 물어보세요.
- “그냥 믿어.”, “의심하면 죄야.”, “고통은 하느님이 벌주신 거야.” 같은 말은 피하세요.
- 고통과 죽음에 관한 질문이 실제 상실 경험에서 나왔다면 교리 설명보다 경청과 돌봄을 먼저 하세요.
- 마지막에는 정답 시험 대신 “오늘 새롭게 생각한 한 가지”를 서로 말하고 짧게 기도해 보세요.
함께 읽어 볼 성경과 교리서
- 지혜서 13장 —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에서 창조주를 생각해요.
- 시편 19편 — 하늘과 창공이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해요.
- 로마서 1장 — 창조물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능력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해요.
- 가톨릭 교회 교리서 31-36항 — 세계와 인간에게서 하느님을 알아 가는 여러 길을 설명해요.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9항 — 참된 신앙과 참된 과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가르쳐요.
- 가톨릭 교회 교리서 283항 — 우주와 생명의 발전에 관한 과학 연구를 소중하게 바라봐요.
- 가톨릭 교회 교리서 309-314항 — 악과 고통의 문제에는 성급한 한마디가 아닌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답한다고 가르쳐요.
이 자료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어린이·청소년용 교리 보조 자료예요. 한 번의 비유로 하느님의 신비를 모두 설명하려 하지 말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계속 질문하고 함께 배워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