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찾아가는 기적 · 질문 7

루르드에서 정말 병이 낫나요? 몇 건이나 인정됐나요?

바위 절벽 벽감에 성모상이 서 있고 그 아래 동굴 입구와 촛대, 난간 앞에 순례자들이 모인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사진

질문: “수백만 명이 다녀가는데 인정된 게 겨우 몇십 건이면, 그냥 저절로 나은 사람들 아닌가요?”

교회의 답: 숫자부터 바로잡을게요. 2026년 현재 72건이에요. 한국어 자료 상당수가 아직 70건으로 적고 있어요. 71번째는 1923년에 치유된 영국인 존 트레이너인데, 1926년에 이미 루르드에서 인정됐던 것을 2024년 12월 8일 리버풀 대주교가 공표했어요. 영어권에서는 처음이에요. 72번째는 안토니아 라코이고 2025년 4월 16일에 발표됐어요.

이야기의 시작은 이래요. 1858년의 베르나데트 수비루는 열네 살이었고, 파산한 집이 예전에 감옥으로 쓰던 방 한 칸에 살고 있었어요. 천식을 앓았고 프랑스어를 제대로 읽고 쓰지 못했어요. 집에서 쓰는 말은 비고르 지방 방언이었어요. 2월 11일 땔감을 주우러 갔다가 마사비엘 동굴에서 한 여인을 보았고,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해 방언으로 “아케로”, 곧 “저것”이라고만 했어요.

두 장면이 중요해요. 2월 25일, 여인이 샘에 가서 물을 마시라고 했는데 샘이 없어서 베르나데트는 땅을 팠어요. 처음엔 진흙탕이었고 네 번째 시도에 마실 수 있었어요. 구경하던 사람들은 아이가 흙을 먹는다며 비웃었어요. 그 자리가 지금 루르드의 샘이에요. 3월 25일에는 여인이 자기 이름을 밝혔어요. “케 소이 에라 이마쿨라다 콘셉시우”, 나는 원죄 없는 잉태다. 베르나데트는 그 말의 뜻을 몰라 잊어버릴까 봐 되뇌며 본당 신부에게 달려갔어요. 신부가 놀란 이유는 그것이 4년 전에 선포된 교의의 용어였기 때문이에요.

심사 제도도 함께 봐야 해요. 1883년에 의무국이 세워졌고 1947년에 국제의학위원회가 더해졌어요. 신앙 여부를 묻지 않고 의사를 받아요. 신고는 7천 건이 넘었고 인정은 72건이에요.

인정 범위: 타르브 주교가 1862년에 인정한 것은 발현의 진정성이에요. 개별 치유는 “의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확인이고, 그것을 기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환자가 속한 교구의 주교예요.

반박: “표본이 너무 커요.” — 1858년 이래 2억 명 넘게 다녀갔어요. 그 모수에서 72건은 자연 관해의 통계적 배경과 구별되지 않아요. 2014년 의학사 학술지에 실린 연구는 1909~14년 411명의 기록과 1947~76년 인정 25건을 다시 검토하고 진단 기록의 부실과 추적 기간의 부족, 심인성 질환의 비중을 지적했어요. 그리고 1976년부터 2006년까지 삼십 년간 인정이 0건이었어요. 의학이 정밀해지자 인정이 사라졌다는 뜻일 수 있어요. 잘린 팔다리가 자란 사례는 한 건도 없어요.

다시 물으면: “그럼 인정 절차 자체가 허술한 건가요?” — 오히려 반대예요. 7천 건 중 72건만 남긴 것은 심사가 작동한다는 뜻이에요. 반증 가능한 절차를 스스로 운영하는 종교 기관은 드물어요. 삼십 년 공백에도 이유가 있어요. 2006년에 판정 범주를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치유”로 바꾼 뒤 확인 사례가 다시 나오고 있어요. 개별 사례에는 자료가 남아 있어요. 1963년 비토리오 미켈리는 골반뼈가 녹아내리는 육종이었고 치료 대상조차 되지 못했는데, 1964년부터 1971년까지의 엑스선 사진에 뼈가 다시 만들어진 것이 남아 있어요. 국제의학위원회가 두 차례 검토해 만장일치로 설명 불가 판정을 냈어요. 1987년 장피에르 벨리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침대에 누워 100퍼센트 장애 판정과 간병인 수당을 받던 사람이었어요.

한 문장 답: “‘의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치유가 일흔두 건 있다’와 ‘하느님이 하셨다’는 서로 다른 말이야. 교회는 앞을 확인하고 뒤를 신앙으로 고백해.”